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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월간조선] 월터 폰트로이 목사 인터뷰
등록일 2009-04-30 조회 9854

[인터뷰] 미국 흑인민권운동의 산 증인 월터 폰트로이 목사

 

“비폭력은 전 세계에 적용될 수 있는 철학”
 
“비폭력 노선을 고집한 민권운동으로 인해 박해받던 少數는 박해하던 多數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계속되던 차별과 억압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단 한 발의 총알도 쏘지 않고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던, 기적과도 같은 변화를 이끌어낸 것입니다.”

⊙ 예일대 신학대학원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조우, 1963년 ‘워싱턴 행진’ 조직
⊙ 워싱턴DC 하원대표로 ‘마틴 루터 킹의 날’ 제정, 南阿共 인종차별 철폐에 앞장
⊙ “종교인들은 서로 다른 종교 간의 이해와 화해를 증진시키는 데 앞장서야”
尹禎皓 자유기고가·美 예일大 정치학 박사과정 재학 중
 “실례했습니다.”
 
  인터뷰를 위해 객실에 들어간 필자는 당황하고 말았다. 월터 폰트로이 목사는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뜬 그는 옷매무새를 고치고 오겠다며 잠시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는 극도로 피곤해 보였다. 올해 76세인 폰트로이 목사가 통일교의 초청으로 서울에 온 것은 4월 3일. 결핵으로 장기간 투병생활을 했던 그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그는 필자와 인터뷰한 다음날인 7일 새벽 출국할 예정이었다.
 
  폰트로이 목사는 미국 흑인민권운동의 산증인이다. 그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표현한 ‘모세 세대(Moses Generation)’, 즉 흑인민권운동 1세대에 속하는 인물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최측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그는 ‘여호수아 세대(Joshua Generation)’라 불리는 新(신)세대 흑인 정치인들과도 가까운 사이다.
 
  폰트로이 목사는 정치가로도 활약했다. 그는 1971년 미국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흑인 정치단체인 ‘흑인의원모임(Congressional Black Caucus)’을 창설했고, 1981년에는 이 모임 회장을 지냈다. 오바마 美(미) 대통령도 이 모임의 회원이었다.
 
  그는 1977년부터는 미국 전역에 있는 약 200개 흑인 단체의 CEO를 멤버로 하는 전국흑인리더 원탁회의(National Black Leadership Roundtable)를 이끌어 왔다. 그는 청운의 꿈을 품은 흑인 젊은이들을 物心(물심)양면으로 도우면서 그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주어 왔다.
 
  약 5분 뒤, 폰트로이 목사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피곤기가 사라진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먼저 폰트로이 목사의 젊은 시절을 회고하는 질문을 던졌다.
 
 
  마틴 루터 킹과의 만남
 
  ―폰트로이 목사께서는 예일대 신학대학원을 나오셨습니다. 어떻게 해서 신학교에 진학하게 됐습니까.
 
  “워싱턴DC에서 태어나서 자란 덕분에 어려서부터 정치를 좋아했습니다. 정치토론을 즐겼고 정치학과 헌법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헌법에서는 萬民(만민)이 평등하다고 했는데 현실에서는 버젓이 인종차별이 자행되고 있는 이유를 알고 싶었어요. 대학을 졸업하자 예일대 신학대학원에 추천서를 써 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오더군요. 주저없이 승낙했습니다. 그것은 제 인생을 바꾼 결정이었습니다. 대학원에서 대단히 중요한 만남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건 조지아 출신의 한 젊은 신학도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조지아 출신의 젊은 신학도’란 마틴 루터 킹 목사 아닙니까.
 
  “어느 날 한 흑인 젊은이가 신학대학원에 찾아와 하룻밤 재워 줄 수 있느냐고 부탁하더군요. 저는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와의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습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는 그의 방대한 지식에 놀랐습니다. 더 놀란 것은 그의 열정이었습니다. 그는 ‘지금은 평범한 목사의 길을 걷는 데 안주할 때가 아니다. 인종차별 철폐에 앞장서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날 우리 두 사람은 8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가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킹 목사가 흑인민권운동 지도자가 될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전에도 黑白(흑백)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민권운동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던 이들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이들은 극히 적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언론을 통해 낯익은 인물이 흑인민권운동을 이끌고 있는 모습을 접했습니다. 저와 함께 밤새 토론을 했던 킹 목사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민권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된 폰트로이 목사는 흑인을 차별하는 商街(상가)에 대한 不買(불매)운동을 벌이는 등 인종차별 철폐운동에 나섰다. 그의 열성적인 활동은 킹 목사의 눈에 띄게 됐고, 이후 그는 킹 목사와 함께 흑인민권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됐다.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연설로 유명한 1963년의 ‘워싱턴 행진’을 조직한 사람이 바로 폰트로이 목사였다.
 
  ―‘워싱턴 행진’ 당시의 일들을 기억하십니까.
 
  “그때 저는 행사준비를 맡았는데, 행사 전날 느닷없이 마이크와 스피커가 작동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사보타지를 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死色(사색)이 되어 동분서주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는 도움을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어요. 행사시간에 맞춰 작동이 안되면 행진은 실패로 끝날 것이 분명했습니다. 마이크와 스피커가 제대로 작동이 안되면, 수많은 인파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때 어디선가 ‘마이크 테스팅, 원, 투, 스리…’라는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순간 눈물이 나왔습니다.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서더군요.”
 
 
  “비폭력은 전 세계에 적용될 수 있는 철학”
 
1963년 8월 23일 워싱턴DC에 모인 30만명의 군중들 앞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폰트로이 목사는 이 행사를 조직했다.

  킹 목사는 생전에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인물이었다. 많은 백인들은 그를 ‘빨갱이’라고 비난했다. 더 큰 비판은 흑인사회 내부에서 나왔다. 흑인 급진주의자들은 그를 기회주의자라고 매도했다. 그가 비폭력 노선을 고수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흑인사회 내부에서 킹 목사의 비폭력 노선에 대한 비판이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
 
  “블랙파워운동을 이끌었던 스토클리 카미카일 같은 흑인 급진주의자들은 킹 목사가 추구했던 비폭력 노선에 반대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로부터 영감을 얻은 비폭력 노선을 현실에서 적용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민권운동의 분수령이 된 1965년 셀마 행진의 예를 들어 보죠. 앨라배마州(주) 셀마市(시)에 집결한 행진 참가자들은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백인 경찰들에게 두들겨 맞았습니다.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피에는 피로,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킹 목사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폭력을 사용해야 언론이 관심을 보인다’거나, ‘公權力(공권력)의 폭력에 대한 폭력은 정당하다’면서 자신들의 주의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들에게 미국 흑인민권운동의 교훈을 잊지 말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비폭력 노선을 고집한 민권운동으로 인해 박해받던 少數(소수)는 박해하던 多數(다수)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계속되던 차별과 억압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민권운동가들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박해를 받았지만 단 한 발의 총알도 쏘지 않고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던, 기적과도 같은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비폭력은 흑인인권운동뿐 아니라 全(전) 세계에 적용될 수 있는 철학입니다.”
 
  1971년 워싱턴DC 최초의 흑인 대표로 선출된 뒤 그는 흑인의원모임을 결성했다.
 
  ―흑인의원모임을 결성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흑인 정치인들이 중앙정치 무대에서보다 조직적인 행동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965년 참정권법을 계기로 흑인들도 투표를 할 수 있게 된 뒤 흑인의원들의 숫자는 날로 늘어갔지만 워싱턴 정계에서 영향력은 미미했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1969년 민주당 특별위원회가 결성됐습니다. 이 특별위원회가 2년 뒤인 1971년 흑인의원모임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저를 비롯해 총 13명의 흑인의원들이 모여서 흑인의원모임을 결성했죠.”
 
 
  ‘마틴 루터 킹의 날’ 제정
 
  워싱턴DC의 ‘대표’는 연방하원에서 워싱턴DC를 대표해 법안을 상정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지만 의결권은 없다. 하지만 대표로 9선을 기록하는 동안 폰트로이 목사는 흑인들의 민권향상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가장 큰 업적은 킹 목사의 탄생일을 국정공휴일로 만든 것이다. 1986년 이후 미국인들은 킹 목사의 탄생일을 전후한 1월 셋째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미국에는 많은 국경일이 있지만 개인의 탄생일에 그의 이름을 붙여서 기념하는 것은 ‘마틴 루터 킹의 날’이 유일하다. 미국의 國父(국부)인 조지 워싱턴의 탄생일도 국정기념일이지만 그날은 ‘조지 워싱턴의 날’이 아니라 ‘대통령의 날(President Day)’이라고 부른다.
 
  폰트로이 목사는 “흑인민권운동 지도자의 탄생일을 전 국민이 기린다는 사실은 노예제를 폐지한 뒤에도 오랫동안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을 했던 미국의 국가 이미지를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南阿共 인종차별철폐 앞장서
 
1984년 11월 29일, 폰트로이 목사(왼쪽)는 킹 목사의 미망인 코리타 여사(가운데) 등과 함께 駐美남아공대사관 앞에서 아파르트헤이트정책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폰트로이 목사는 1980년대 초반 남아프리카공화국(南阿共)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폐지하는 운동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84년 11월, 워싱턴DC에 있는 남아공 대사관 앞에서 넬슨 만델라를 비롯한 남아공 흑인인권운동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평화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됐다. 폰트로이 목사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덕분에 유명세를 탔습니다. 전 세계 뉴스에 제 이름이 나왔죠. 이 시위를 기점으로 해서 미국 내에서 남아공의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여론이 급속도로 퍼져 나갔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는 경제제재도 불사해야 한다는 여론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이런 여론에 힘입어 저와 동료 의원들은 남아공 제재법안을 만들었고, 1986년 ‘反(반)아파르트헤이트법’이 의회를 통과했습니다.”
 
  평생을 흑인민권운동에 헌신했던 그에게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의견을 물어 보았다. 그는 “두 가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첫째는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것입니다. 미국의 흑인민권운동이나 남아공의 인종차별 철폐운동 모두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입니다.
 
  아울러 전 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국이 남아공 제재법안을 통과시키자 전 세계가 남아공에 대한 제재에 동참했습니다. 나중에는 남아공의 植民母國(식민모국) 영국도 동참했습니다. 결국 압력에 못 이겨 남아공 정부는 넬슨 만델라를 석방하고, 인종차별 정책을 폐지했습니다.”
 
 
  “오바마는 ‘아메리칸 드림’이 허구가 아님을 보여줘”
 
  ―오바마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오바마 대통령은 ‘아메리칸 드림’이 허구가 아님을 세계에 보여줬습니다. 그와 함께 그는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잘못된 정보에서 시작된 이라크전쟁의 막을 내리기 위해 점진적인 撤軍(철군)을 단행하고 있습니다. 서민들의 편에 서서 소수의 탐욕으로 야기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런던 G20 頂上(정상)회담에서 보여줬듯이 어려움에 처한 제3세계 국가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 지지율은 아직 60%대를 유지하고 있지만 국민들의 약 3분의 2는 나라가 여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답합니다.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공화당 전국위원회 위원장이 된 마이클 스틸 前(전) 메릴랜드州(주) 副知事(부지사)는 오바마 행정부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스틸 위원장에 대해서는 너무 섣불리 평가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는 누구보다 제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의회에 있었을 때 그는 제 밑에서 인턴을 했습니다. 그는 진보적 공화당원을 대표합니다. 그는 러시 림보(최근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보수 방송인)나 앤 쿨터(미국의 여류 보수논객) 등 공화당 내 極右(극우) 인사들과는 다릅니다. 무엇보다 그는 극단적인 시장방임주의자와는 거리가 멉니다. 맹목적으로 특권층의 편을 들지도 않습니다. 부자가 잘되면 자동적으로 모든 사회가 잘될 것이라고도 믿지 않습니다. 그는 서민층의 삶을 증진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폰트로이 목사는 전형적인 1세대 흑인 정치인이다. 同性(동성)결혼 등 ‘가치’ 문제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하지만, 분배 문제를 중심으로 한 경제 문제에 관해서는 리버럴한 관점을 견지했다. 그는 쉽게 보수주의자 또는 진보주의자라고 규정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의 이런 면모는 W. 부시 전 대통령 시절, ‘종교 기반 구상’(Faith Based Initiative: 교육·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종교단체들의 역할을 장려하는 정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종교 기반 구상’은 지금도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슈 가운데 하나다. ‘변화’를 모토로 집권을 했음에도 오바마 대통령이 부시 행정부의 ‘종교 기반 구상’을 확대하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부시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부시 대통령 8년은 기대에 못 미쳤다는 것이 대다수 미국인들의 평가입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업적이 전혀 없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아프리카를 포함해 빈곤에 처한 나라에 대한 지원을 획기적으로 늘린 것은 부시 행정부의 큰 업적이었습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업적을 꼽자면 ‘종교 기반 구상’을 들고 싶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교육·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종교 단체들의 역할을 확대하고 장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어떻게 ‘종교 기반 구상’에 참여하게 됐습니까.
 
  “부시 대통령이 제게 직접 전화를 걸어 협조를 요청했는데, 저는 기꺼이 응했습니다.”
 
  ―하지만 ‘종교 기반 구상’은 실패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저도 성공적이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원대한 구상에 비해 결과물은 대단히 실망스러웠어요. 부시 전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하느라 국내정책에 신경을 쓸 수 없었습니다. 대통령 주변에 있는 말과 행동이 다른 ‘가짜 예언가’들이 ‘종교 기반 구상’의 성격을 변질시켰습니다. 하지만 결과물이 실망스러웠다고 해서 그 구상을 처음 시작할 때의 문제의식도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교인은 사회적 책임감 잊지 말아야”
 
폰트로이 목사(왼쪽에서 두 번째)가 2006년 11월 27일 미국 내 이슬람교 및 유대교 지도자들과 워싱턴 로널드 레이건 공항을 나오고 있다.

  폰트로이 목사는 목회자 신분으로 민권운동과 현실정치에 참여했다. 미국 수정헌법 1조는 政敎(정교)분리의 원칙을 명시하고 있고, 토머스 제퍼슨 등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상당수도 정교분리의 원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종교인의 사회참여는 우리나라에서도 심심찮게 논란이 되는 문제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도 종교단체가 현실정치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무엇보다 神學(신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로마교황청의 전횡이 낳은 폐해를 잘 알고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 가톨릭은 靈的(영적)생활뿐 아니라 정치에도 간섭을 했습니다. 聖地(성지)를 되찾아야 한다면서 十字軍(십자군)운동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슬람 국가들은 물론이고 기독교 국가들에도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를 입혔습니다.
 
  하지만 저는 모든 종교인은 종교인으로서의 책임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도한 정치활동은 문제가 되겠지만 사회에 대한 기여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목사님의 말씀은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기도했던 릭 워런 목사가 빈곤퇴치, 질병퇴치, 환경보호 등의 분야에서 종교인의 책임을 강조한 것을 연상케 합니다.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종교인의 사회적 책임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방금 말씀하신 세 가지 분야 모두 중요하다고 봅니다. 거기에 하나를 덧붙이자면 종교인들은 서로 다른 종교 간의 이해와 화해를 증진시키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이번 서울 방문 중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 등 종교 지도자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모든 종교가 서로에 대한 불신과 증오를 버리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종교의 이름으로 21세기에도 살인과 파괴 약탈이 자행되는 것을 방관해서는 안됩니다.”⊙
 


  ▣ 미국의 흑인 정치파워
 
  “이젠 놀랍지도 않네요.”
 
  흑인 친구들에게 흑인 정치인의 성공에 대해 질문을 하면 돌아오는 대답이다. 그만큼 흑인 정치인들의 활약이 눈부시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미국 각지에서 흑인들이 시장이나 주지사로 선출되는 경우가 크게 늘고 있다. 데이빗 패터슨 뉴욕주 지사, 드발 패트릭 매사추세츠주 지사, 아드리언 펜티 워싱턴DC 시장, 코리 부커 뉴욕 시장 등이 그들이다.
 
  과거 인종차별이 극심했고 아직도 주민 중 백인 비율이 90% 이상인 남부 도시에서도 흑인 시장이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이 같은 성과는 우연이 아니다. 흑인의원모임의 자매기관인 흑인의원모임재단(Congressional Black Caucus Foundation)과 1909년에 창설된 유색인종권익증진협회(NAACP) 등 흑인 단체의 체계적인 노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NAACP는 전국에 걸쳐 있는 수백 개의 지부로 구성된 NAACP 청년 대학생부를 운영하며 미래의 리더를 양성하는 데 공을 들였다. 흑인대학기금(United Negro College Fund)과 함께 장학금 사업도 벌였다.
 
  흑인의원재단의 노력도 눈부셨다. 인턴 경험을 쌓으며 정책개발 과정에 대한 심도있는 성찰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의회 펠로 프로그램, 의회 인턴십 프로그램 등을 운영해 왔다. 오바마를 비롯한 여호수아 세대의 신화는 저절로 이뤄진 것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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