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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헤럴드경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곡선의 언어를 빚어내다
등록일 2012-06-18 조회 7810

발레리나서 경영자로…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의 꿈과 삶 
  

선화예고 졸업후 모두가 선망하는 英로열발레학교 입학했지만 발표기회 조차 안주는 차별에 자퇴…모나코 왕립발레학교서 진짜 발레에 눈떠

1984년 유니버설발레단 창단하고 보니 발레 불모지 한국의 환경에 당황…첫 창작발레 ‘심청’ 땐 남자 무용수 없어 학교 인쇄소 아저씨까지 동원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발목 부상…시범조차 보여줄 수 없어 날개 잘린 새처럼 절망했지만…지금은 다친 후배들 다독이는 좋은 경험돼

작년엔 한국발레 알리려 신작 발굴보다 해외공연 집중…경영은 여전히 무거운 짐이지만 발레 대중화 꿈에 힘든 줄 몰라



“저의 삶을 짧게 요약한다면 ‘신앙’과 ‘발레’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훈숙(49) 유니버설발레단 단장이 몇 년 전 한 종교행사에서 춤 40년 인생을 돌아보며 한 말이다. 발레는 그에게 신앙과 같은 존재였다. 발레리나가 몸을 곧추세우고 고개를 뺀 채 가능한 먼 곳을 응시하는 포즈야 말로 그는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고 생각해왔다. 일상의 걸음걸이,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도 그는 허투루 내걷지 않는다. 무대 위를 걷는 듯 조심스럽고 바르다. 발레의 본고장 러시아에서 창작발레 ‘심청’을 공연, 큰 호응을 얻고 돌아온 문훈숙 단장을 최근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만나 춤 인생에 대해 들었다. 유니버설발레단을 창단, 28년째 이끌어오고 있는 그는 발레리나에서 이제 경영자로 우뚝 섰다.

▶인생의 전환점 하나, 유년 시절과 리틀엔젤스클럽

문훈숙 단장의 한국생활은 리틀엔젤스클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살다 10세 때 아버지 손을 잡고 한국에 들어왔다. 그때 그는 자신이 왜 한국에 가는지 알지 못했다. 무엇을 하게 될 지도 모르는 채였다. 그는 외할머니댁에서 한국생활을 시작했다. 일주일 뒤 아버지는 어린 문훈숙을 리틀엔젤스클럽에 가입시켰다. 그렇게 그는 한국에 남았고 아버지는 떠났다. 어린 문훈숙은 두려움에 떨며 울고 또 울었다. 친척이라곤 외할머니와 이모. 처음 보는 얼굴이었고 낯설었지만 곧 적응해야만 했다. 문 단장의 유년 시절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말도 익숙지 않은 상태에서 리틀엔젤스클럽에 들어간 지 두 달 만에 해외 공연을 떠났다. 새롭게 우리나라 전통무용도 배워야 했다. 문 단장은 “그때 조금 소극적인 성격이 되기도 했지만 이내 적응하며 밝아졌다”고 말했다.

선화학교에 다니기 전까지 발레는 그저 재미있는 취미에 불과했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공연하고 노래 부르는 생활이 대부분이었다.

그가 발레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그야말로 평범했다. 미국에서 생활하던 7세 때 어머니가 동네 슈퍼에 나붙은 발레학교 광고를 보고 일주일에 두 번 레슨을 시킨 것이 그가 발레를 접하게 된 계기였다. 40년이 넘는 그의 발레 인생의 시작이었다.

▶인생의 전환점 둘, 선화예술학교에서의 인연, 해외에서 겪어야 했던 차별

1976년 선화예고에서의 인연은 본격적인 발레에의 입문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특히 에드리언 델라스(Adrienne Dellas) 선생님과의 인연은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그동안 재미로만 했었던 발레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게 된 것이다. 문 단장은 “그 전까지 발레는 여동생과 취미로 했었을 뿐 전공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델라스 선생님을 통해 발레는 본격적인 인생의 목표이자 삶이 됐다.

문 단장은 “델라스 선생님이 스파르타 식으로 지도하셔서 가르치실 때 신발로 때리시기도 하셨지만 정도 많으셨고 집에 가서 함께 밥도 먹고 얼굴 마사지도 해 드렸을 정도로 연습실 밖에선 엄마, 친구처럼 지냈다”고 회상했다.





선화예고를 졸업하고 1979년 모두가 선망하는 영국의 로열발레학교에 입학했지만 저변이 넓지 않았던 한국발레에 대한 차별을 몸소 체험해야만 했다. 열심히 연습했지만 외국인들만 있는 반에 편성돼 1년에 한 번 있는 발표회에서도 기회를 잡을 수 없었고, 유학시절 홀로서기는 너무 힘들었다. 결국 편견과 차별, 상처 때문에 로열발레학교를 그만뒀다. 아예 발레를 그만둘 생각도 했다.

그랬던 그가 7, 8년 전 외국에서 발레를 공부하던 한 아이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그는 그 아이의 편지를 보고 예전 발레 유학시절이 떠올랐다고 한다.

영국 유학을 그만두고 1980년 아버지의 권유로 모나코 왕립발레학교에 들어갔다. 모나코는 영국과 달리 날씨, 분위기도 달랐다. 발레학교 교장이었던 마리카 베소브라소바 선생님은 일본 문화에도 조예가 깊고 동양문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문 단장은 “스트레스 골절로 점프를 하지 못하고 있으니 선생님이 의자를 가지고와 다른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앉혀놓고 발을 쓰다듬으며 치료를 해 줬다”고 회상했다.

▶인생의 전환점 셋, 유니버설발레단 창단과 결혼

세간에서 말하는 ‘영혼결혼식’에 대해 문 단장은 말을 아끼는 편이다. 지금은 그저 ‘운명’이라는 단어로 모든 걸 함축해버렸지만 문 단장에게 유니버설발레단의 창단과 결혼, 두 가지가 동시에 운명처럼 갑자기 다가왔다.

남편 문흥진의 죽음과 영혼결혼식, 유니버설발레단의 창단, 1984년은 그에게 있어 운명적인 한 해다.

“그렇게 짜맞추려고 해도 안 되는 부분이죠. 영혼결혼식을 하기 전 부터 이미 발레단 창단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분(남편 문흥진)이 사고가 날 거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선화학교를 바탕으로 발레단이 창단됐고 저는 영혼결혼을 하면서 한국에 들어와 발레단 활동을 시작했죠. 영혼결혼을 했어도 제가 발레단을 만들 생각이 없었다면 발레단도 안 만들었을 겁니다. 그게 참 신기해…다 운명 같아요.”





그는 남편 문흥진 씨와 정혼상태에서 이별의 아픔을 겪었다. 1983년 12월 마주오던 트럭을 피하려다 교통사고가 나 이듬해인 1984년 1월 2일 세상을 떴다. 50일 뒤 그는 죽은 남편과 영혼결혼식을 올렸다. 그 아픔과 고통을 견디게 해준 건 발레단 창단이었다. 그해 7월 국내 최초 민간 발레단인 유니버설발레단은 그렇게 탄생했다. 문훈숙은 무용수로서 발레단장으로 28년 역사를 함께 시작했다.

문 단장은 유니버설발레단과 함께 발레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했고 1986년 선보인 창작 발레 ‘심청’은 그 첫 시도였다.

“처음엔 남자 무용수들이 없어서 고생했어요. 심지어 남자 연극배우가 발레를 하기도 하고 발레 선생님이 학교 인쇄소 아저씨를 끌고와 연습을 시키기도 했죠. 심청 아버지 역할을 맡은 김현우 씨도 원래는 연극 전공이에요.”

그렇게 유니버설발레단은 한국 창작발레의 역사를 써 갔다.

‘심청’을 준비하며 주인공 심청을 연기해야 했던 문 단장은 심청이 인당수에 투신하는 장면을 연습하며 크게 놀랐다.

“뱃전 세트 아래 매트를 깔아놓고 1, 2층 높이에서 떨어지라는데 매트리스 옆에 난간도 없고 뱃전과도 멀리 떨어져 있더라고요. 망설이고 있으니까 괜찮다며 문화재단 이사장님(박보희)이 직접 시연했는데 그 분이 떨어지며 뼈에 금이 가고 안경도 깨지고 다쳤어요. 결국 매트 옆에 난간을 설치했죠.”

유니버설발레단의 역사와 함께한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심청’은 진화를 거듭했다.

‘심청’은 창단 다음해 바로 준비에 착수, ’86아시안게임에 축하공연으로 선보였다. ’88올림픽 때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 보다 드라마틱한 심청을 선보였다. 세계인에게 다가가기 위해 전통음악에서 서양 클래식 음악으로 바꿨다. ‘심청’은 그의 자부심이다.

▶갑자기 찾아온 발목 부상, 새의 깃털을 자른 듯

11년 전, 문훈숙 단장은 갑작스런 발목 부상으로 오랜 기간 발레를 그만둬야만 했다.

“발을 다쳤을 당시엔 약간 지쳐있는 상태였어요. 처음엔 너무 좋았죠. 쇠사슬에 묶여 있다가 풀린 느낌이었어요. 출근 안 하고 싶은 날이 있듯이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을 때가 있잖아요.”

2001년 12월, 자연물리치료를 6개월간 시도했지만 잘되지 않아 이듬해 6월 수술을 했다. 수술은 성공했지만 회복은 쉽지 않았다.

수술 이후 회복기간에 의사가 움직이지 말라고 해서 6주 동안 반 깁스를 하고 다녔다. 하지만 상처가 굳어지면서 뒤꿈치가 1㎝도 올라가지 않았다. 수술은 잘됐는데 일상생활이 안 될 정도로 발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발레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1년 동안 재활치료를 한 다음에야 문 단장의 발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무대에 서진 않더라도 내가 지도할 때만큼은 시범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무대에 서는 욕심은 안 부려도 연습실에서 음악을 틀고 움직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걸 못하니까 그때의 심정은 정말 새가 날지 못하도록 날개의 깃털을 자른 듯한 심정이었죠.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간 것 같았어요.”

1년이 넘는 재활기간이 끝나고 완전히 발꿈치를 올릴 수 있게 된 순간 문 단장은 다시 깃털이 돋아난 느낌이었다. 후배들에게 수술만큼 회복기간도 중요하다는 생생한 가르침을 줄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발레리나에서 경영자로 제2의 인생

발목 부상으로 무대에 설 수 없게 됐지만 그에겐 더 중대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니버설발레단의 경영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재활기간 동안 무용을 쉬다 보니 경영의 ‘경’자도 모르는 그에게도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이 보였다. 홍보 등 전반적인 경영에 대한 손이 필요했다.

한동안 단장 역할을 하면서 무용수로 뛰었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에 집중할 수 없었다. 회사 경영에 대한 책임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 문 단장은 누구에게도 권유하고 싶지 않다며 당시의 힘들었던 시절을 회고했다.

“몇 년 동안 양쪽 모자를 다 쓰고 있었는데, 누구에게도 권유하고 싶지 않아요. 연습실에 있으면 사무실이 걱정되고 사무실에 있으면 공연이 걱정되고, 고민이 많았죠. 그 당시 제 춤이 많이 손해를 받았어요. 춤에만 집중했으면 더 잘 추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고요.”

무대는 냉혹하다. 핑계가 있을 수 없다. 관객들이 사정을 봐가며 보는 게 아니다. 관객에겐 완벽한 무대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춤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었다.

부상을 당한 뒤 무대 복귀를 포기했다. 서른아홉의 나이, 마흔 전후로 은퇴하는 것이 정상인 무용수들에게 발레는 직업이 아니라 삶이기에 은퇴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다.

“할 만큼 했고 무대를 후배들에게 물려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잘할 때 그만두는 것은 쉽지 않아요. 그땐 좀 지쳐있었기 때문에 빨리 회복됐으면 좀 쉬었다가 다시 췄을지도 몰라요.”

마음은 아직도 춤과 함께하고 있는 그는 지금도 연습실에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한편으론 발레단 경영은 그에게 아직도 힘든 부분이다.

“경영 자체가 좀 안 맞는 것 같아요. 회의하고 이런 건 경영을 전문으로 배운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나름 노력은 하지만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성격 자체도 나서고 홍보하고 그런 성격이 아니다 보니 지금도 무용수들, 지도교사들이 부러워요.”

그런 문 단장이 최근 ISPA( (International Society for the Performing Artsㆍ국제공연예술협회)가 주는 공로상을 수상했다. 그는 주변에 있는 좋은 사람들이 많이 도와준 덕분이라며 주위의 공으로 돌렸지만 전 세계에 한국 발레를 알리고 발레단을 이만큼 이끌어온 것은 그의 공이 크다.


문영규 기자/ygmoon@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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