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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시사IN] 문국진 이사장, 문형진 회장 인터뷰 특집 보도
등록일 2008-06-05 조회 12250

시사주간지 '시사IN' 36호(2008.5.24)에 기획기사가 보도 되었습니다.



문선명 총재 세 아들에게 앞날을 맡기다

34년간 광폭 행보로 통일교의 해외 기반을 확대해온 문선명 총재가 종교·기업·NGO 3대 분야를 이을 후계 체제로 아들 3형제를 전진 배치해 한국 공략에 나섰다. 기독교계가 ‘이단’이라고 배척해온 문선명 총재 체제의 통일교 안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36호] 2008년 05월 20일 (화) 14:01:57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뉴시스
피스컵 시상식장에 함께 참석한 문선명 총재 부부와 세 아들. 왼쪽부터 7남 형진, 3남 현진, 문 총재 부부, 4남 국진씨.

20세기 한국에서 태동한 대표 신흥 종교로 세계에 이름을 알린 통일교가 최근 ‘포스트 문선명 체제’를 구축했다. 34년간의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2003년 영구 귀국한 문선명 총재는 최근 7남6녀의 자녀 중 막내아들인 문형진씨(30)를 교단 책임자로 내정했다. 4월18일 그를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한국 및 세계 회장으로 임명해 교단의 총책임을 맡긴 것이다. 그는 지난해 말 통일교의 본부교회 격인 서울 용산 청파동교회 당회장을 맡으면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기독교 대형 교회는 최근 잇따라 아들을 후계자로 내세웠는데 통일교도 그리 다를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통일교의 후계 구도 포석에는 독특한 면이 있다. 교단을 종교와 통일교 재단 내의 기업 경영, 비정부기구활동(NGO) 분야로 나눠 세 아들에게 분담하는 체제를 꾸린 것이다. 교단의 핵심 축이라 할 신앙 부문은 7남 문형진 회장, 기업 경영은 4남 문국진 이사장, 그리고 초종교초국가연합을 중심으로한 NGO 부문은 3남인 문현진 천주평화연합 회장이 각각 맡았다.

그동안 문선명 총재의 2인자로는 박보희·곽정환·황선조 씨 등 이른바 ‘가신 그룹’으로 불리는 교단 내 제자들이 유력하게 꼽혔다는 점에서 친자녀 3인방 체제를 만든 것은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과거 세계일보 사장과 금강산국제그룹 회장을 맡으며 오랫동안 문 총재의 후계자로 꼽혀온 박보희씨는 대중국 투자 사업에 실패하면서 전면에서 물러났다. 현재 박씨는 자기 딸이자 문 총재의 둘째 며느리인 문훈숙씨가 단장으로 있는 유니버설발레단 이사장으로 있다.

박보희씨와 마찬가지로 문 총재와 사돈 관계이며 문현진씨의 장인이기도 한 곽정환씨 역시 주요 직책을 문 총재 자녀에게 넘겼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세계회장 자리를 문형진씨에게, 세계일보 부회장 자리를 문국진씨에게, 그리고 통일그룹 세계회장 자리를 사위인 문현진씨에게 각각 내줬다. 곽씨는 선문학원 이사장, 한국프로축구연맹 회장 등을 맡고 있다.

문선명 총재의 조카사위인 황선조씨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한국회장 자리를 문형진씨에게 물려줬지만 최근 문 총재가 공을 들여온 평화통일가정당 총재와 여수 화양지구 개발 사업을 주도하는 (주)일상 회장직을 맡고 있다.

   
ⓒ시사IN 정희상
통일교가 여수엑스포 기반시설을 겸해서 여수시 소호동 일대에 대규모 호텔과 콘도를 짓고 있는 오션리조트 특구 공사 현장.

올해 89세인 문선명 총재는 아직 현역으로서 매일 새벽 4시 ‘훈독회’라는 이름의 공식 집회를 주관하는가 하면 국내외를 오가면서 왕성하게 선교 활동을 진두지휘한다. 이 때문에 교계에서는 문 총재가 자신의 사후 가신 그룹과 아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것에 대비해 생전에 후계 체제의 틀을 잡았다고 분석한다. 과연 통일교 안에서는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이단 시비 피해 해외에서 세력 확장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라는 이름을 가진 통일교는 일반인에게는 다소 특이한 종교 조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20여 년간 통일교는 단순한 종교로서보다는 왕성한 사회·문화·스포츠 활동으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축복결혼’이라 부르는 수만 쌍 부부의 합동결혼식, 활발한 대북사업과 세계 각지의 전·현직 정치·종교 지도자들을 초청해 벌이는 평화 관련 행사, 피스컵 축구대회, 리틀엔젤스 예술단 공연 등이 이미지를 이루는 주된 요소였다.  

1954년 문선명 총재가 기독교계에서 분파해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는 이름으로 창립한 통일교는 출발 자체만으로도 한국 기독교계에 큰 파문을 몰고 온 사건이었다. 통일교 창립 1년 만에 기독교계 대학인 이화여대 교수와 학생들을 신도로 끌어들여 집단 퇴직·퇴학 사태를 부르는 등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1955년 여름 문선명 총재 등 간부가 고소당해 급기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 총재는 몇 달 지나지 않아 사법부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아 교세를 본격 확장해나갔다.

이후 통일교의 국내 행보에 기독교계는 늘 ‘이단’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통일교가 성경을 경전으로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기성 기독교계와 비슷했으나 교주인 문선명 총재를 ‘참부모님’ ‘구세주’ 등으로 칭해 초창기부터 줄곧 기독교계로부터 이단으로 배척당한 것이다.
그러나 통일교는 국내 기독교단의 이같은 이단 시비를 피해 주요 포교 무대를 세계로 넓혀 ‘마이웨이’에 박차를 가했다.

   
ⓒ시사IN 정희상
현재 문선명 총재가 거주하며 국내외 행사와 사업을 지휘하는 경기도 가평 장락산 자락의 천주청평 수련원.

창립 초창기부터 세계를 활동 무대로 표방한 문 총재는 1958년에는 일본, 1959년에는 미국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등 해외 포교에 몰두했다. 그 결과 한때 일본에서 자칭 300만 신도를 확보했다고 자랑할 만큼 교세를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그 기세에 놀란 일본 조야의 통일교세 저지 운동에 부닥쳐 세력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지금도 통일교의 헌금과 인력의 절대 다수는 일본으로부터 나온다. 문 총재는 1960년 이래로 대규모 국제합동 축복결혼식을 통해 1만여 명의 일본 여성을  한국 농촌 총각 신자 등과 결혼시켜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1990년대 들어 문선명 총재는 활동 방향을 종교 자체보다는 인류 보편 가치인 평화, 사랑, 가정행복 등으로 전환한다. 1994년 창립 40년 만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는 간판을 내리고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을 창립한 것이다. 이 무렵부터 문 총재가 특별히 공들인 지역이 북한이다. 1991년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전격 회담을 벌여 세계를 놀라게 했던 그는 이후 북한에 평화자동차공장, 보통강호텔 등을 설립해 운영한다. 이 과정에서 문 총재는 김 주석으로부터 평양에 통일교 목사(일본인) 파견을 허용받아 형식적이나마 북한에 해외 선교사를 파견한 첫 종교라는 기록을 보유했다.
 
북한·통일교 핫라인의 비화

통일교의 북한 진출은 사업성보다는 남북 관계가 막힐 때 보이지 않는 물꼬를 트거나 가교 노릇을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991년 문 총재와 김일성 주석 간 회담 당시 두 사람 사이에 ‘비밀 핫라인’을 개설한 덕분이었다. 이후 남북 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그 비밀 핫라인 구실을 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우선 1994년 1차 북한 핵 문제로 남북한과 미국이 전쟁 직전의 위기까지 치달았을 때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전격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김영삼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이끌어낸 일이 있다. 당시 대북 채널이 없던 카터는 통일교 핫라인을 통해 방북을 성사시켰다. 문 총재가 북한과의 채널 유지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는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직후 국가보안법을 어기면서까지 세계일보 박보희 사장을 조문 사절로 보냈던 사건이 잘 말해준다. 이렇게 북한과 구축한 핫라인은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남북 정상회담 전에도 막후에서 가동됐고, 국정원도 이 채널을 활용했다. 통일교는 당시 정상회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사전에 평양예술단을 서울로 초청해 공연하는 기획을 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 과정에서도 통일교는 핫라인을 은밀하게 가동했다. 방북 후 노 대통령은 북한 남포에 있는 평화자동차공장을 공식 견학했고, 정부 방북단 일행 40여 명은 통일교가 운영하는 평양 보통강호텔에서 묵었다.  

문선명 총재는 대북사업에 한창 공들이던 1990년대 중반 ‘세계 경영’에도 광폭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다. 미국 뉴욕 시 외곽 이스트가든에 자리한 통일교 수련소를 거점 삼아 직접 세계 185개국을 다니며 선교사를 파견하고 낙후한 나라에 대한 재정 지원 등으로 신임을 얻어 교세를 확장해 나간 것이다.
지난 수년간 전용 비행기를 몰고 세계 각국을 넘나들며 통일교 교세 확장에 몰두해온 문선명 총재가 공적인 자리에서 던지는 화두는 ‘세계 평화 실현’이다. 그는 세계 평화가 ‘하나님의 참사랑’으로 이뤄진다면서 그런 세계 건설을 구체화하기 위해 자기가 왔다고 주장해왔다. 이 과정에서 그가 가장 정성을 쏟은 분야는 낙후한 국가에 막대한 물량 원조하기였다. 국제구호친선재단을 설립해 아프리카 등 저개발국가에 식량·의류·의약품을 원조하는가 하면, 분쟁과 재난 지역에 긴급구조 고아원 운영, 의료봉사, 기술교육, 수자원 개발 등에 집중 지원한 것.

   
ⓒ통일교 제공
석가탄신일에 합천 해인사로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을 찾은 문 총재의 7남 문형진 회장(왼쪽 세 번째) 일행.

그는 특히 앞으로 식량난이 인류 미래를 위협할 것이라며 이 문제에 적극 뛰어들었다. 1994년 10월부터 남미 브라질 자르딘에 3억 평의 ‘새소망농장’, 파라과이에 2억 평, 우리과이와 아르헨티나 합쳐서 1억 평 등 총 6억 평의 땅을 매입해 농장을 일궜다. 또 해양이 미래 기아 해결의 희망이라며 물고기를 재료로 만든 ‘피시파우더’를 아프리카 난민에게 공급해 인심을 얻었다. 각종 통일교 행사에 이들 나라 지도자가 많이 참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막대한 자금 들고 국내로 U턴한 까닭


그의 야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유엔이 제 기능을 못한다면서 유엔을 대체할 새로운 평화기구로 천주평화연합(UPF)를 창설해 “유엔이 하지 못한 한계를 극복하고 종교와 영적 각성을 바탕으로 지구촌 분쟁과 전쟁을 막는 데 민간 유엔의 구실을 하겠다”라고 역설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세계 각국의 전·현직 지도자를 초청해 국제 신뢰도를 높이려고 공을 들였다. 레흐 바웬사, 아버지 부시, 고르바초프 등 전직 지도자가 그의 행사에 단골로 참여했다.
세계를 무대로 사업을 벌이다 보면 막대한 돈이 들어갈 것은 불문가지. 과연 그는 어디에서 그 많은 자금을 조달하는 것일까. 통일교는 ‘종교이자 기업’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통일교는 타 종교와 달리 기업·문화·언론·교육·스포츠 분야의 다양한 사업체를 운영한다. 우선 언론으로는 미국의 워싱턴타임스와 UPI 통신사, 일본 세계일보, 한국 세계일보 등을 들 수 있다.

또 세계 각국에서 해양산업과 항공기계산업, 에너지산업, 관광산업, 자동차산업, 식음료산업 등에 투자해 막대한 수익을 올린다. 특히 아프리카와 남미의 저개발국에 집중 투자해 해당국의 민심과 자금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 잡기에 여념이 없다.
한국에서 직접 운영하는 통일그룹 관련 기업도 적지 않다. 인삼 및 의약품 전문회사인 (주)일화를 비롯해 일신석재, 용평리조트, 선원건설, 일상해양산업 등 20여 기업이 통일교 사업체이다. 또 성남일화 축구단을 운영하며 국제 클럽축구 대항전인 피스컵 축구대회를 지원한다.

현재 국내 통일그룹은 종합 레저그룹이라 불릴 만큼 사업 방향이 변하며 급팽창하고 있다. 사계절 종합 휴양지인 용평리조트와 서울 강남의 메리어트호텔 등도 통일교 관련 기업이다. 이어서 문 총재는 해외 통일교 자금 2조원을 들여와 여수 화양지구 해양관광 레저단지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통일교의 이런 기반시설 투자가 없다면 2012년 여수엑스포 개최는 불가능하다고 여수시청 측은 실토한다.

지난 34년간 미국을 무대로 펼쳐온 문선명 총재의 야심찬 ‘세계 경영’은 최근 들어 국내로 유턴하는 모양새다. ‘1000만 신자’를 자랑한다는 한국 기독교계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주 무대를 해외로 옮겼던 문 총재가 고국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위해 문 총재는 통일교 창립 1세대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2세 자녀를 전진 배치했다.

그러나 문 총재가 목표로 하는 국내 통일교 교세 확장은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유난히 기성 기독교세가 강한 한국사회에서 통일교의 이미지는 아직까지 일반 국민에게도 ‘이단’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지난 4·9 총선 때 254개 전 지역구에 가정당 후보를 내보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당시 가정당은 겨우 1.7%를 득표하는 데 그쳤다.

그동안 통일교 비판에 앞장서온 부산 장신대 탁지일 교수는 “통일교가 아무리 종교 색채를 벗고 사회 봉사활동과 세계화를 열심히 해도 ‘문선명씨가 재림주가 되는 지상천국 건설’이라는 궁극의 종교적 목적을 변경한 적은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통일교의 사업 방식을 보고 정통 기독교가 반성해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정통 교회보다 이단이 더 윤리적이며 국내외에서 왕성한 봉사활동으로 세력을 더욱 확장해나가는 반면, 정통 교회는 이기적·비윤리적 모습으로 점점 고립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룹 흑자 경영으로 후계 체제 돕겠다”
문선명 총재는 4남 국진씨를 통일교 기업 군단의 구원투수로 긴급 투입했다. 하버드 대학 경영학과와 마이애미 대학 MBA 과정을 수료한 그는 3년 만에 적자 기업을 흑자로 전환시켜 주목된다.
[36호] 2008년 05월 20일 (화) 14:03:28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시사IN 윤무영
국진씨(위)는 “동생이 가진 신앙의 힘으로 통일교회가 더욱 발전하리라 자신한다”라고 말한다.
세간에는 아버지가 후계 구도를 문형진-문국진 쌍두마차 체제로 짜려고 한다는데….

동생은 종교 쪽, 나는 경영관리 쪽으로 기용하셨다. 1993년부터 미국에서 KAHR라는 민수용 총기 제작사를 세워 CEO를 맡아 성공한 경험을 높이 사신 것 같다. 한국에 오기 전 미국 회사는 1000억원대 흑자를 기록해 개인적으로는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부르시니 어쩔 수 없이 들어왔다.

종교 교주의 아들이 총기류 회사를 운영했다는 것이 좀 뜻밖인데….
미국에서는 민간 총기 소유가 자유롭고 제작도 합법이다. 대학 시절부터 총기와 사격에 관심이 많아 신형 총기 설계로 미국 특허를 6개나 땄다. 총기 회사를 설립한 뒤에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총을 개발해 미국 경찰에 공급해 큰 이익을 남겼다. 원래 취미가 사격, 사냥 등인데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그럴 공간도 시간도 없어 답답하다. 그래도 재단 경영이 아버님과 교회, 신자를 돕는 일이어서 보람을 찾는다.

통일그룹 재단 경영을 맡아 어떻게 바꿨나?
2005년부터 통일그룹 재단 이사장을 맡아서 3년간 대대적 경영 수술을 단행했다. 와보니 33개 이상의 회사가 방만하게 운영돼 80% 이상이 적자였다. 곧바로 경영 진단을 벌여 11개 회사를 매각하는 등으로 정리하고 현재 22개 회사만 남겼다. 1년 만에 1000억원대 적자를 350억원대 흑자로 전환하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구조조정 문제로 머리가 아파 잠을 못 잤다.

문 총재가 그룹을 적자 상태로 유지해온 이유는 어디에 있었다고 보나?
아버지께서 국내에서 시작하신 통일그룹 재단은 종교 목적이었기 때문에 사업 쪽에서는 필연적으로 적자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은 적자를 보더라도 모든 사람을 자기 자식으로 생각해 품고 오셨으니까 기업 운영은 좀 안 되는 편이었어도 기반은 계속 넓혀오신 거다. 외환위기 직후 부도까지 맞았고, 결국 국내 그룹의 적자를 개선해달라고 나를 부르셨다.

통일그룹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현재 총매출 8000억원에 순익은 350억원대다. 22개 기업 중 용평 콘도를 개발하면서 운영 면에서는 아직 흑자가 아니지만 개발 이익을 좀 봤다. 발전 가능성을 가장 높게 보는 일화는 2005년 당시 연간 60억원 적자였다가 경영 개선을 통해 흑자로 전환시켰다. 자본금 2000억원대 규모의 선원건설과 상장회사인 일신석재도 알짜 회사다.

아버지를 어떻게 평가하나?
한국은 대부분 타국에서 종교가 들어와 정착했지만 아버님은 한국인으로서 종교를 일으켜 세계 각국에 전파하셨다. 통일교가 커지면서 그 많은 사람이 다시 한국으로 온다. 로마가 지금 전세계 기독교인의 성지이듯 통일교가 발전하면 한국이 세계 통일교인의 성지가 되는 것이다. 종교의 영역을 넘어서서 보더라도 아버님은 정말 애국하셨다고 본다. 그동안 세계 각국을 돌며 벌인 수많은 활동과 사업은 한국의 대외 이미지 개선에 도움이 됐고, 돈도 한국에서 나간 것이 아니라 외국에서 교회 헌금과 기업 운영을 통해 국내로 들여왔다.

막내 동생 형진씨가 사실상 통일교 책임자가 된 데 대해 서운함은 없나?
동생은 지금껏 종교로만 살아왔다. 비록 내 동생이지만 누구에게나 겸손하고 검소하게 살며 목회에 전념하는 모습에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님은 동생이 하버드 대학에서 종교학 박사 과정까지 공부하기를 원하셨지만 나는 동생이 석사를 마쳤으니 바로 아버님을 이어 목회를 시작하게 해달라고 강력히 건의드렸다. 동생이 가진 신앙의 힘으로 우리 교회가 더욱 발전하리라는 믿음과 자신감이 있다.






 

“이단이라 배척해도 기독교를 사랑한다”
문선명 총재의 막내 형진씨(30)는 일곱 아들 중 유일한 목회자로 ‘신앙의 후계자’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는 한때 불교에 심취해 삭발한 채 승복을 입고 다닌 ‘기인’이기도 했다.
[36호] 2008년 05월 20일 (화) 14:06:24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시사IN 윤무영
형진씨(위)는 “아버지같은 카리스마로 통일교를 지휘할 수 없기 때문에 민주적 시스템을 정착시키려 한다”라고 강조했다.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 자리한 통일교 본부교회 내 허름한 사저 집무실에서 문형진 회장을 만났다. 한 살 연상인 부인 이연아 목사와 20세에 결혼해 10년 만에 슬하에 5남매를 둔 그는 사실상 통일교의 책임자가 된 뒤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문 총재가 막내아들을 사실상 후계자로 내정했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

다른 종교에서는 후계자가 되면 전권을 넘겨받지만 통일교는 좀 다르다. 아버지는 자녀 3형제를 세우셨다. 나는 종교, 국진 형님은 경영, 현진 형님은 NGO 활동을 맡도록 하셨다. 아버지가 우리 형제에게 전승자 구실을 나누도록 조처하신 것이 타 종교와 차이일 것이다.  나는 교회 조직의 직책을 떠나 많은 신자를 섬기고 모시는 자세로 임하겠다. 그런 뜻에서 한국 총회 본관으로 출근하지 않고 청파동 교회 사택에서 생활하며 기도 정성을 드리는 삶을 산다. 지금은 내가 세계회장으로 임명받았지만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고, 지휘도 돌아가며 다른 분이 맡을 수 있다고 본다.

다른 형제들은 자주 만나는가?


미국과 영국에서 수학하는 누님 둘과 형님 한 분을 제외하고 5남매가 아버지 사시던 한남동 사택에서 함께 산다. 그 자녀만 14명인데 매일 한집에서 한솥밥을 먹고 지낸다.

통일교주의 아들로서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며 남다른 성장 과정을 거쳤을 텐데….


20여 년 전만 해도 우리 가족은 미국에서 많은 핍박을 받으며 뉴욕의 이스트가든이라는 수련소에서 생활했다. 아버님은 대부분의 시간을 통일교회를 개척하러 세계 각국으로 다니셨는데, 어린 시절 거의 매일 “문선명 아들딸을 납치해 죽이겠다”라는 괴전화에 시달렸다. 심지어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도 경호원이 늘 붙어다녀 어린 마음에 원망도 많았다. 신변 문제 때문에 초·중·고교는 집 근처에서 다녔고, 그 뒤에야 코네티컷 주에 위치한 천주교 계통의 페어필드 대학교로 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역사학을 전공했는데 같이 살며 유일하게 의지하던 바로 위 영진 형님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뜨면서 인생무상과 크나큰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했다. 가톨릭계 대학이라 신부님과 인생 상담을 한 끝에 종교학으로 바꿔 하버드 대학에 편입해 석사 과정까지 마쳤다.

문선명 총재는 가정에서 자녀교육을 어떻게 시켰는가?


예수 닮고 싶어서 ‘어린 양’을 많이 키운다는 말씀으로 여러 자녀를 두셨다. 아버님이 바쁜 가운데서도 자녀에게 가르치신 삶의 자세는 ‘융통성’이었다. 물론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고 목표로 삼는 일에서는 무조건 열과 성을 다 바치라는 주문도 늘 하셨다.

하버드 대학 시절에는 유난히 불교에 심취했다던데….


컬럼비아 대학에서 동양학을 전공하다 급작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신 영진 형님을 못 잊어 형님 방에 꽂힌 동양학 관련 책을 읽어보면서 시름을 달래다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하버드 대학에서 전공을 세계종교학 비교종교 연구로 잡은 뒤 미국인 천주교 신부님과 유학 오신 한국 불교계 정관 스님을 만나 불교사상 논문을 도움받는 과정에서 불교에 더욱 심취했다. 이때 홀연히 인도로 가서 달라이라마를 만나 불교사상 강의도 듣고, 삭발을 한 뒤 스님 복장으로 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하루는 법장 스님께서 스님들과 동국대학 교수 일행 50여 명을 인솔해 하버드 대학을 방문하셨는데, 내가 그분들을 특별 초청해 만나뵈면서 인연이 더욱 깊어져 법장 스님 열반할 때도 참석하는 등 오랜 교분을 쌓아왔다. 이번 부처님 오신날에도 해인사에 가서 종계종 종정 법전 스님을 만나뵙고 왔다.

통일교주의 아들이 일찍부터 다른 종교에 심취한 데 대해 아버지는 반대하지 않았나?

뉴욕 집에 아버님이 오신 날이면 통일교회 신자가 찾아와 함께 훈독회(새벽 기도)를 하셨는데 하루는 내가 삭발하고 스님의 누비 두루마기를 입고 참석하니 다들 놀라며 아버지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질까 조마조마해하는 눈치였다. 당시에는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아버님이 뜻밖에 “형진이 이 아이는 내가 이렇게 입어보라고 시켰으니 아무 걱정들 하지 말라. 이렇게 여러 종교를 다 경험하고 공부하고 나면 끝내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라며 다른 신자의 불안감을 달래셨다. 그 순간 나는 ‘아버님이 모든 종교를 포괄하는 분이로구나’ 느끼면서 비로소 통일교인이 되었다.

   
ⓒ통일교 제공
하버드 대학 재학 시절 불교에 심취해 삭발을 하고 달라이라마(가운데)를 찾아간 문형진씨(오른쪽).
신자들을 상대로 짝을 지정해 행하는 ‘축복결혼식’이 세계의 보편적 추세인 자유연애와 결혼에 반하는데….


일반인은 교회에서 배우자를 맺어주는 데 거리감을 느낄 수 있다고 보지만 통일교 신자는 가정이 하나님께서 함께 사실 집이니까 이를 성스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님도 많이 변하셨다. 세계적으로 신자가 늘어나 축복결혼식을 다 거행하기 힘든 면도 있지만, 각 가정 단위로 하나가 될 수 있는 방향을 강조하고 영역을 확대해왔기 때문에 결혼도 훨씬 자유로워졌다. 이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공유하면서 부부 간 인권 유린이나 외도 등을 반대하고 순결을 지키겠다고 서약하면 가족 간 교류 속에 연애를 해도 축복의 대상이 된다.

기독교계에서는 ‘예수님은 실패한 메시아’라 표현하는 통일교 교리를 들어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한다.

그건 잘못된 지적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전세계를 하나님 말씀으로 통일하려는 사명감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메시아라고 믿는다. 그러나 박해 세력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힌 채 그렇게 가신 것, 본래 오신 최종 목적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일은 아닐 텐데  당시 시대 상황이 이를 제대로 못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못박아버려서 아쉬운 것이다. 통일교회의 원리론 설명을 여기서 말하기는 길지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세계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 다른 민족과 종교끼리 공격하지 않으며, 그런 하나님의 사명을 앞장서서 실천할 사명이 한국에 있다고 믿고 한국에서 태어난 우리부터  실천하자는 이론이다.

앞으로도 기독교계로부터 이단이라는 공격은 계속될 터인데 어떻게 대응하려고 하나?


통일교가 기성 기독교에 비해 성서를 해석하는 이론 면에서 이견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에 안티가 없다. 예수를 사랑하는 기독교를 우리도 형제로서 사랑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기독교가 끝까지 우리를 이단이라 박해해도 우리는 똑같이 대응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들어 미국에서는 통일교 신자가 기독교 교회에 가서 예배도 보고 사역도 함께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에서 그 사람의 교파가 아니라 행동과 말과 믿음을 보면서 판단해야 한다고 본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통일교회를 개척한 아버지 뒤를 이을 자신이 있는가?


아버님은 모든 것을 직접 컨트롤할 수 있었지만 우리 2세는 아버님처럼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걸 알면서 권력을 잡겠다고 욕심 부리면 안 된다. 앞으로 통일교도 제왕처럼 한 사람이 절대 권력을 쓰면 안 좋다고 본다. 나는 권력을 줄여 시스템으로 운영하려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실시한 교단 내부의 선거는 큰 변화다. 그동안은 상부에서 임명하는 방식이었지만 나는 ‘민심이 천심이다’는 진리를 믿기 때문에 각 교구 구석구석 실정을 더 잘 아는 신자가 직접 지도자를 선택하는 게 더 낫다고 보고 그런 제도적 변화를 단행했다. 우리는 식구(신자)가 선택한 분들과 같이 일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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