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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간조선] 문형진 회장 인터뷰 보도
등록일 2009-05-25 조회 11161



[주간조선] 통일교의 젊은 회장, 문선명 7남 문형진
이동훈 기자 flatron2@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입력 : 2009.05.26 17:24 / 수정 : 2009.05.28 16:37

 
photo 김승완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불교에 빠져 삭발한 채 하버드대 활보
절에 데려가 격려한 아버지에 두손 들어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57호에 게재되었습니다.>

문형진

1979년 미국 뉴욕 출생

하버드대 철학과 졸업

하버드대 신학대학원 졸업

현) 통일교(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세계회장


통일교(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세대교체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때문에 메시아적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종교와 사업을 이끌어온 문선명(90) 총재의 뒤를 이을 2세들에게도 주변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통일교 내부적으로는 문선명 총재의 4남인 문국진(39)씨가 재단과 사업 쪽을, 7남인 문형진(30)씨가 종교 분야를 맡기로 교통정리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비교적 활발한 대외활동을 해온 문국진 회장과 달리 지난해 4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세계회장 겸 한국회장에 취임한 문형진 회장은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다. 지난 5월 19일 서울 용산구 청파동의 통일교 본부교회에서 만났을 때도 그는 쑥스러운 듯한 웃음을 지으며 “나와 형님인 문국진 회장이 아버지 대신 통일교 일을 맡고 있지만 아직도 중요한 결정은 아버지가 직접 내린다”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용산구 청파동 통일교 본부교회는 문선명 총재가 처음 포교를 시작한 곳이다. 

문선명 총재의 뒤를 이어 전세계 1000만명의 신도를 이끌게 된 문형진 회장은 처음부터 독실한 통일교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1979년 문선명 총재의 자택이 있는 미국 뉴욕의 웨스트 체스터에서 나고 자란 문 회장은 어릴 때 종교에는 별 관심이 없는 평범한 아이였다. ‘브루스리(이소룡)’에 심취해 이소룡의 절권도를 흉내 내며 ‘아뵤’를 외치던 전형적인 ‘쿵푸키드’ 였다.


뉴욕서 태어나 이소룡 흉내 내던 쿵푸키드
형의 갑작스런 죽음이 불교에 심취한 계기

“당시는 미국에서 재키찬(성룡), 제트리(이연걸)가 본격적인 인기를 얻기 전입니다. 이소룡이 여전히 엄청나게 인기였죠. 그래서 제 방에는 이소룡의 포스터가 가득 붙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하는 활동도 일종의 ‘쇼’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학교 졸업 후에 종교가 아닌 사업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의 누나와 형들은 이소룡 흉내를 내던 천진난만한 형진씨에게 ‘사랑스럽다’는 뜻에서 ‘러비’라는 별명까지 붙여줬다.

하지만 문 회장은 또래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학창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문선명의 막내아들’이란 꼬리표가 항상 그를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심지어 ‘납치하겠다’ ‘죽이겠다’는 등의 협박전화도 집으로 걸려왔다고 한다. 1970년대 미국 진출 초기 문선명 총재가 성적·도덕적으로 타락한 미국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유하며 급속히 교세(敎勢)를 늘려가자 종교계의 기득권 세력이 견제의 눈초리를 보냈고, 미국 정부에서도 통일교를 우려의 눈길로 쳐다봤다고 한다.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형진씨는 집밖을 나갈 때면 항상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녀야만 했다.

그러던 중 한 사건이 문 회장의 삶의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그가 무척이나 따르고 존경했던 한 살 터울의 형 문영진(6남)씨가 네바다주 리노의 한 빌딩에서 의문의 추락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영진씨의 정확한 사인(死因)은 아직까지 규명되지 않았지만 일부에서는 ‘자살’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형님이 죽고 형님 방에서 형님이 보던 책을 꺼내 봤습니다. 형님은 미 컬럼비아대학에서 동양학을 전공하고 있어서 책장에는 유교, 도교, 선불교에 관한 책들이 많았습니다. 그 책들을 꺼내 보면서 인생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특히 선불교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문선명 총재 ‘불교 공부 더 해보라’ 격려
“한때 아버지가 ‘쇼’하는 걸로 의심했죠”

친구같이 지내던 형이 죽은 이후 문 회장은 스님들이 입는 잿빛 가사를 입고 머리를 삭발한 채로 재학 중이던 하버드대 캠퍼스 곳곳을 돌아다녔다. 심지어 아버지 문선명 총재가 주관하는 기도회(훈독회)에 참여하면서도 잿빛 가사를 입고 삭발을 한 채 목탁을 들고 등장하기도 했다. 때문에 일부 통일교 신자들은 “문 총재의 막내아들이 불교도가 됐다”고 수군댔고, 일부는 등 뒤에서 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선명 총재는 신도들에게 “욕하지 말라”며 일성을 가하고 문 회장에게 오히려 힘을 실어줬다고 한다. “제가 삭발을 한 채로 나타났을 때 교인들이 상당히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신도들에게 ‘이 아이는 지금 종교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라며 오히려 ‘불교를 더 공부해보라’고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심지어 저의 손을 잡고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 해인사에 직접 데려가 보여주셨습니다.”

아버지 문선명 총재의 손에 이끌려 한국의 불교를 접하면서 문 회장은 오히려 통일교에 투신하게 됐다. 아버지의 진정성과 통일교의 종교적 관용성에 대해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그렇게 사랑하시는 분이 절(부처님)까지 사랑하는 모습이 너무 멋있었습니다. 사실 아버지가 ‘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했는데 그런 종교적 관용 때문에 진심으로 통일교 신자가 됐습니다.”

부인 이연아씨와 문형진 회장 / 미국 시절 삭발한 채 달라이 라마를 만난 문형진씨(오른쪽).

교구장 선출에 미국식 선거제 도입
재정팀 신설, 재단 헌금관리 투명화

이후 문 회장의 종교적 다양성은 폐쇄적인 이미지로 굳어있던 통일교를 일반인과 여타 종교인들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도 됐다. 그는 미국에 있을 때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를 직접 예방했고, 조계종 전(前) 총무원장인 법장스님 열반식에도 참여했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善終) 때도 직접 조문을 했다.

지난 2007년 7월부터 문 회장이 한국에서 목회활동을 시작하면서 통일교 내부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일요일 예배 시간에 불교식 명상시간을 도입한 것은 가장 큰 변화다. 교회 조직에도 변화를 시도해 각 시도 단위의 교구장 선출도 하향식 낙점에서 상향식 선거제로 바꿨다.
“우리 형제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배워서 그런지 공동체 안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대표로 선출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과거 회장이 모든 것을 낙점할 때는 사람들이 회장한테만 잘 보이려고 했죠. 저는 투명문화, 공평문화를 통일교에 도입했습니다. 물론 선거에 따른 부작용도 있지만 장점이 단점보다 훨씬 더 큽니다”

뿐만 아니라 문 회장은 헌금 관리를 전담하는 전문 재정팀을 신설해 헌금 관리의 투명성도 높였다. 문 회장이 교회 조직에 변화를 가하자 미국이나 일본과 달리 감소세를 보이던 국내 통일교 신자 수도 지난해에는 플러스로 돌아섰다. 내부에서는 “통일교의 변화된 리더십이 긍정적인 효과를 낳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리더십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 회장은 카리스마 넘치는 아버지 문선명 총재에 대해서는 여전히 존경의 눈빛을 보내는 듯했다. “아버지는 영적인 카리스마가 강한 분입니다. 모든 종교의 창시자가 그렇듯이 핍박을 받으면서 성공했기 때문에 종교적 의지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떤 장애물이 와도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있습니다. 작년에 헬기 사고가 났을 때도 앰뷸런스를 타고 매일 새벽 5시에 열리는 훈독회(기도회)에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헬기 사고 때 기적적으로 아무 탈이 없었던 것도 그런 힘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7월 19일 경기도 가평의 한 야산에 추락한 문선명 총재의 헬기에는 문 회장의 자녀 2명도 동승하고 있었지만 헬기에 탑승했던 16명은 모두 무사했다. 당시 사고가 났던 지점은 그 전에도 군용헬기가 떨어져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곳이었다. 문 회장은 “헬기 추락 후 탑승자 전원 생존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문 회장은 일부에서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종교계의 세습에 관해서는 ‘예수와 사도 바울’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사도 바울이 아무리 설교 능력이 뛰어나도 결코 예수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아버님의 대신자, 상속자가 아닌 그냥 아버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통일교는 아버지 문선명 총재를 중심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만약 아버지가 저를 해고하면 저도 (교회에서) 나가야지요.” 


통일교 방식대로 19살에 합동결혼
“교인들 자부심 회복이 내 급선무”

가정을 꾸리는 데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통일교의 지도자답게 문 회장도 일찍 결혼을 했다. 통일교 목사의 딸이자 자신보다 한 살 연상인 이연아(31)씨와 19살 되던 해인 1997년 9월 6일 결혼해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벌써 4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뒀다. 현재 부인 이연아씨도 목사(축사장) 자격으로 문형진 회장의 목회활동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다. 이들 부부는 매일 새벽 2시30분이면 어김없이 잠에서 깨 기도와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문 회장은 통일교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잡은 한·일 국제결혼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지금까지 통일교 주관의 한·일 간 국제결혼으로 현재 한국에 1만쌍, 일본에 3000쌍의 한·일 국제결혼 부부들이 살고 있다. 지난해에도 500쌍 정도의 국제결혼을 주선했다.

“통일교에서는 주로 원수간의 국제결혼을 주선합니다. 기독교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구절이 있지만 통일교는 한 발 더 나아가 ‘원수와 결혼하라’는 식이지요. 원수가 결혼해 아이를 낳고 키우면 각각 친가와 외가가 되기 때문에 절대 미워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한국과 일본, 일본과 미국, 미국과 러시아, 백인과 흑인 간의 결혼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문화차이나 독특한 결혼절차 때문에 이혼율이 높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혼율은 전체 부부의 5% 미만이라고 한다. 특히 독실한 신자들일수록 이혼율이 낮다.

“결혼은 도(道)를 닦는 것처럼 출발해야 합니다. 서로 격려하고 문화차이는 노력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가정은 모든 조직의 기초가 됩니다.” 통일교에서는 부부 중 한쪽이 외도를 하거나 잠적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이혼을 용인하고 있다고 한다.

혼전순결에 관해서도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고 있다. 아담과 이브의 예에서 보듯 거짓된 사랑, 서로를 탐닉하는 사랑은 모든 죄악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문형진 회장 부부도 결혼을 하기 전에는 그 흔한 이성교제 한번 못해봤다. “결혼은 하면 상대방에게 가장 값진 선물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순결한 마음과 순결한 몸이 상대에게 가장 값진 선물이지요. 순결한 모습으로 아이를 낳고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는 것이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중요합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문 회장은 “통일교 식구로서의 자부심 회복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통일교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입니다. 아직도 군대에서 종교란에 ‘통일교’라고 쓰거나,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이 종교가 통일교라고 밝히면 특별상담이 들어옵니다. 우리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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