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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매일경제뉴스] 시티 초대석 - “발레? 축구만큼 힘든데 표정관리까지 해야죠”
등록일 2011-06-03 조회 10707




한국 발레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영원한 지젤’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이 발레 대중화를 위해 짬을 내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 나왔다. 문 단장을 만나 발레에 얽힌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문훈숙 단장은 “지금 발레는 대세이다”라는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백조의 호수’를 다룬 ‘블랙스완’이나 중국 발레리노의 성공 스토리를 그린 ‘마오의 라스트댄서’ 같은 영화가 세계적 인기를 끄는가 하면, 개콘에 발레리노가 등장했고 김연아 선수는 ‘지젤’로 세계적 인기를 얻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발레가 아직은 일반인에겐 접하기 힘든 생소한 예술이라고 했다. 그 발레를 알리려고 몇 번 나섰는데 자신의 얘기를 곁들이는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토슈즈 신으니 세상 꼭대기에 선 듯”

문훈숙은 미국 워싱턴DC 근교 버지니아주 맥클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동네 슈퍼에 붙은 광고를 본 엄마가 보내서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 1년은 발레봉 잡고 기본만 배웠다. 1년 뒤 토슈즈를 신고 너무 기뻐 세상 꼭대기에 선 것 같았다.” 그곳 학교에서 ‘피리 부는 소년’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서기도 했던 그는 이후 진짜로 세상 꼭대기에 선 발레리나로 성장했다.

그는 리틀엔젤스 입단을 운명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리틀엔젤스를 운영했다. 그래서 자식 중 하나라고 보내야 했는데 가장 가냘프고 핏기가 없어 보이는 내가 선택됐다. 아버지는 나를 외가에 맡겨놓고 (1주일 만에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 많이 울었다. 무용수의 길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는 김덕수와 신영옥, 강수진 등이 같은 리틀엔젤스 출신이라고 꼽았다.

그를 세운 세 선생님, 그에게 남는 세 작품





문 단장은 발레를 시작한 뒤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는데 특히 한국 발레의 대모로까지 일컬어지는 에드리엔 델라스와 마리카 베스브라소바 모나코 왕립발레학교 교장, 루마니아 출신의 개인교수 제타 콘스탄스 등 세 선생님이 기억이 난다고 했다.

“선화예술학교서 한국무용을 배우려다 마침 외국인 발레 선생님이 오셔서 발레를 선택한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그 분이 에드리엔 델라스다. 델라스 선생님은 연습실 밖에서는 어머니처럼 따뜻한 분이었지만 강의실에선 아주 엄해 발레 슈즈로 종아리를 치기도 했다. 등을 쭉 펴라고 양손으로 눌렀는데 옷 갈아입을 때 보니 열 손가락 자국이 나 있기도 했다. 토슈즈를 꿰매 가지고 가면 리본을 떼어 던지며 다시 꿰매오라고 한 적도 있다. 발을 지탱해주는 리본이기에 튼튼히 꿰매라고 한 것이다.”

델라스 선생님은 엄청난 정열로 학생들을 지도했다.

“학생들이 동작을 제대로 못하자 임신 말기의 몸으로 완벽한 ‘앙트르샤 시스(entrechat six)’시범을 보이며 가르쳤다. 프로 무용수가 되려면 1주일에 6일 이상, 하루 2~3시간 이상 연습해야 하는데 당시 학교에선 주 2~3회, 한 시간씩만 실기를 배정했다. 델라스 선생님은 교무실 책상을 엎으면서까지 강력히 주장해 실기 시간을 늘렸고 그게 선화가 최고의 무용수를 배출하게 된 계기가 됐다.”

그의 지도력은 당시 7명이 영국 로열발레학교 시험을 봤는데 전원이 어퍼(upper) 스쿨에 합격한 데서 잘 나타났다.

“어퍼 스쿨에 가려면 적어도 6년은 훈련해야 하는데 3년 훈련으로 7명 전원이 합격했으니 기적이었다. 델라스 선생님은 그만큼 지도를 잘 했다. 지금도 고민이 있으면 의지하는 분이다.”

그렇게 들어갔지만 로열발레학교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로열발레학교에선 영국인 아니면 모두 외국인으로 분류해 연 1회 하는 발표에도 참석시키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았고 실망이 컸다. 2년차 과정에 합격했지만 부상도 입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어 그만두려고 했다.”

엄마는 당장 돌아오라고 했지만 아버지가 완강히 반대했다. 꼼짝 말고 기다리라고 하더니 당장 날아와 학교 한 곳만 더 보고 그래도 싫다면 그 때 돌아오라고 했다. 그래서 간 게 그레이스 왕비가 운영하는 모나코 왕립발레학교다. 그 학교는 가족적 분위기여서 그의 마음을 풀어줬다. 특히 마리카 베스브라소바 교장선생님이 아주 자상했다고 문 단장은 회고했다.

“런던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점프 동작을 하지 못하고 쉬고 있자 교장 선생님이 오라고 하더니 손을 열심히 비벼 따뜻하게 한 뒤 그 손으로 내 발을 어루만져 주셨다. 그런 정성 덕분에 두 달도 더 걸릴 것으로 생각했던 발이 2주 만에 나아 점프를 하게 됐다.”

모나코에서도 힘든 것은 있었다. 음식이 너무 맛있어 체중조절이 어려웠던 것.

“어느 날 델라스 선생님이 방문해 뒤룩뒤룩 살이 찐 학생들을 보았다. 델라스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저녁을 사준다며 호텔로 오라고 했다. 맛있는 음식을 기대하며 동료들과 호텔로 갔더니 선생님이 물 넉 잔을 주문하고는 “이것이 너희 저녁이다”라고 했다.”

체중조절에 실패하면 발레리나로선 끝이다. 문 단장은 그 가르침을 이어받아 학생들에게 이것만은 엄격히 지키도록 하고 있다.

“체중관리는 프로 무용수의 기본이다.”

모나코 왕립발레학교를 졸업한 그는 당시 유명세를 떨치던 워싱턴 발레단에 입단했다가 1984년 유니버설발레단이 창단되자 귀국했다.

문 단장은 ‘지젤’과 ‘돈키호테’, ‘라바야데르’ 등 세 작품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고 꼽았다.

특히 죽어서 영혼이 된 지젤이 무덤을 찾은 알베르트와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을 담고 있는 지젤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했다.

“나는 지젤에선 늘 남편을 생각하며 춤을 춘다. 연기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작품인데 슬픈 표정을 잘 나타내야 하고 동작과 연기가 거의 이어져야 한다.”

그 어려운 표정연기를 매끄럽게 이끌어준 이가 루마니아 출신의 제타 콘스탄스다.

“제타 선생님은 엄마 같기도 했고, 코치이자 매니저이기도 했다. 내 발이 피곤할 때면 토슈즈를 벗기고 냄새나는 발을 어루만져줬다. 그 믿음이 나를 여기에 서게 했다. 좋은 스승을 만난 게 내 복이다.”

“제타 선생님은 “몸에서 나는 소리를 활용하라”고 했다. 우리 몸은 솔직해 감정을 잘 드러내므로 그것을 활용하라는 것이었다.”

가령 배 아플 때 ‘끙’ 소리 나는 게 자연스러운 것인데 지젤이 아플 때 그냥 아픈 시늉만 하지 말고 배를 움켜쥐고 ‘끙’ 소리를 내면 자연스럽게 슬픈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

문 단장은 러시아 키로프 발레단과 돈키호테를 공연하면서 키트리 역을 맡아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 거기서도 제타는 탁월한 표정연기 기법을 전해줬다.

“돈키호테는 스페인의 화려한 동작을 상체로 표현하는 게 많다. 이 때 S자 손동작의 경우 “사과를 따서 너의 마음을 표현하라”며 사과를 따서 주는 동작을 보여주는가 하면 “부채로 너의 마음을 표현하라”며 부채 뒤에 숨어서 보거나 부채로 바닥을 쳐서 흥겨움을 표현하는 등 여러 감정표현 기법을 세세하게 가르쳐줬다.”

특히 부끄럼을 많이 타는 그가 파트너의 눈을 봐야 하는 대목에선 “눈동자가 무슨 색인지 보라”는 말로 풀어줬다고 했다.

20대에 남다른 표현으로 ‘영원한 지젤’이 된 그는 30대엔 라바야데르에 심취했다.

“라바야데르는 인도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권력 앞에 무릎 꿇지 않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자신을 내세울 줄 아는 여인을 그렸다. 라바야데르의 니키아는 두 가지를 잘 표현해야 한다. 죽어서 영혼이 되어 춤추는 역인데 돈키호테나 흑조 이상으로 어려운 동작이 많다. 라바야데르 3막은 발레 가운데 가장 어렵다.”


‘심청’에 열정 쏟는 원조 심청




원조 심청으로 은퇴공연 작품마저 심청으로 정했던 문 단장은 연초 3년 동안 40개국을 돌며 창작 발레 ‘심청’을 공연하는 계획을 밝혔다.

“심청은 창단 직후부터 준비해 아시안게임 때 처음 무대에 올렸다. 델라스 선생님이 당시 창작발레를 생각한 것은 대단하다. 당초 1, 3막은 한국 작곡가에, 2막은 외국 작곡가에 곡을 맡기려 했는데 외국 작곡가의 곡이 좋아 모두 맡겼다. 1막은 태풍의 시작을 알리듯 비가 한 두 방울씩 떨어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3막은 봉사의 지팡이 소리를 탈춤으로 연결했다.”

25년 동안 수정과 보완을 거쳐 한국문화와 서양 발레의 완벽한 조화를 추구했는데 그 성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와 청의 상봉 장면에선 서양 사람들도 눈물을 흘렸다. 시카고 공연 때 기립박수를 받아 놀랐다. 남녀 간 사랑이 아닌 효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모두 감동했다. 지난 4월 초 대만 공연에선 앞자리에 앉은 한 사람이 “이 작품이 세계 최고다”라고 했다. 서양 발레에 동양 문화를 완벽하게 조화했는데 특히 효를 주제로 해 너무 좋았다는 것이다. 문화의 힘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가 해외 순회공연에 나선 이유다.


문훈숙의 발레 예찬

그는 발레는 장점이 많은 예술이라고 한다.

“발레를 하면 어깨가 부드러워진다. 스트레칭을 많이 하므로 몸이 아주 유연해진다. 오랜만에 발레를 하니 목 근육이 아팠는데 그만큼 발레는 온 몸의 근육(목 근육까지 포함)을 사용하는 운동이다. 게다가 음악을 듣고 하기에 자연스레 스트레스까지 해소된다.”

그는 특히 “극장은 나에게 성당 같다”고 한 세계적 안무가 조지 발란쉰의 말을 빌리어 자신에게 “발레는 신에게 가까이 가는 예술이다”고 했다. 자신이 발레를 선택한 게 아니라 발레가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

“예술가는 모름지기 ‘내가 예술을 선택한 게 아니라 예술이 나를 선택했고 예술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예술 앞에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신체적 조건이 발레에 썩 적합했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신체조건이 좋지 않고 운동신경도 둔하다. 게다가 내성적이기까지 해 지금도 무대에 서는 것을 걱정할 정도다. 모나코 유학시절엔 부끄럼을 많이 타 교장선생님께 상의했더니 “그래? 그렇다면 선택을 잘못했다”라고 했다. 21세 때 창단공연을 했는데 첫 작품인 신데렐라 공연 때 왕자(역)와 눈을 마주쳤다. 남자의 눈을 그렇게 가까이서 본 게 처음이라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탈의실로 달려가 울었을 정도다.”

자신의 의지대로라면 발레의 길을 가지 않았을 터인데 운명이 발레의 길을 가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천재는 99%의 땀과 1%의 영감으로 이뤄진다는 아인슈타인의 이야기처럼 발레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늘 회전 동작이 어려웠는데 모든 동작이 완벽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를 보니 모든 것을 다 받은 것 같았는데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중단했다. 하나님은 늘 우리의 노력으로 넘어야만 하는 숙제를 주는 것 같다.”


경영자 문훈숙




그는 은퇴 후 두 가지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첫 번째 충격은 ‘발레하지 않으니 이렇게 편하구나’ 하는 거였다. 발레는 그만큼 힘들다. 하루 쉬면 내가 알고 이틀 쉬면 선생이 알고 3일 쉬면 관객 모두가 안다. 그래서 휴가 받아도 열흘 이상 쉰 적이 없다. 그 이상 쉬면 복귀가 힘들다. 은퇴하니 쇠사슬에서 풀린 것 같다.”

그는 “발레는 중노동”이라고 한다. 가장 힘든 운동이 미식축구이고 그 다음으로 발레가 축구와 같은 운동량을 보인다는 것. ‘백조의 호수’를 추면 축구 전·후반과 연장전을 뛴 수준이라는 것. 그런데 아무리 힘들어도 항상 표정관리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두 번째 충격은 발레의 벽이 너무 높은 것을 알게 됐다는 것.

“생각한 것보다 높았다. 무용수는 자기 춤만 생각한다. 은퇴 후 관객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됐다. 먼저 손을 내밀고 다가가야 했다.”

발레단 경영을 맡은 후 그는 먼저 10분 동안 작품을 해설한 뒤 공연을 했다. 반응이 좋았다. 관객이 더 잘 이해하는 방법은 없을까하고 3년 고민 끝에 자막을 붙이기로 했다. 역시 좋은 평을 받고 있다.

그는 지금 발레 대중화에 나서고 있다. 강연을 나가고 백화점에서 미니 발레를 시연했다. 지젤 공연에선 ‘만원의 행복’ 프로그램을 도입해 전 좌석 매진 기록도 세웠다.

그의 경영철학은 어떤 것일까.

“경영을 전문적으로 배우지는 않았다. 다만 ‘정원 가꾸듯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물이 부족하면 물을 더 주고, 햇빛이 부족하면 해가 드는 쪽으로 화분을 옮기고, 흙이 부족하면 흙을 갈아주는 방식이 내 경영이다.”


■ 문훈숙이 소개하는 발레 관람법





보통 사람들은 발레를 잘 몰라 언제 박수를 쳐야 할지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해 문 단장은 박수는 언제든 가능하다며 열심히 치라고 했다. “박수를 먹고 사는 발레리나에게 힘이 된다”는 것.

특히 독무가 끝나고 그 무용수가 바로 군무에 나올 수도 있는데 관객의 박수가 없으면 쉬지 못하고 나와야 하니 열심히 치라고 했다. 다만 돈키호테에서 32바퀴 회전, 흑조에서 32바퀴 회전은 기차바퀴 소리에 맞춰 천천히 추게 되는데 이 때 만큼은 절대로 박수를 치지 말라고 했다.

한편 문 단장은 초보자들이 발레를 이해하려면 돈키호테를 보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돈키호테는 열정이 넘치는 화려한 발레다. 그래서 발레 초보자에게 호두까기 인형 이상으로 적당한 작품이다.”


■ 문훈숙 단장은





선화예술학교, 영국 로열발레학교, 모나코 왕립발레학교를 나와 미국 워싱턴 발레단에서 활동하다 1984년 유니버설발레단 창단하자 프리마 발레리나로 돌아왔다. 1989년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러시아 키로프 발레단의 ‘지젤’ 공연에서 객원 주역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1992년 ‘돈키호테’ 1995년 ‘백조의 호수’에 초청받아 공연했다. 2001년 ‘심청’ 공연을 끝으로 행정가로 변신, 유니버설문화재단 이사장으로 발레단 외에 유니버설아트센터, 유니버설발레아카데미, 리틀엔젤스예술단 등을 이끌고 있다.

부끄럼을 많이 타는 그는 가장 힘든 것은 식사조절이나 발 까지는 게 아니라 공연 전 겪는 긴장감이라고 했다. 공연 전엔 집중하느라 고도로 긴장하기 때문에 ‘접근금지’ 팻말을 붙여놓고 싶을 정도라고.

박보희 씨의 3남3녀 중 넷째로 장래를 약속했던 문선명 총재의 아들 흥진 씨가 사고로 사망한 뒤 영혼결혼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글 = 정진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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