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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아닷컴] [O2/내 인생을 바꾼 사람]춤의 요정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바람이 되어준 아빠
등록일 2012-06-01 조회 6949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장의 아버지, 박보희





《 “당신은 ‘팽이’예요.” 이모와 함께 찾아간 절의 스님은 20대 중반의 그를 보더니 화두를 던지듯 말문을 열었다. “팽이는 돌지 않으면 죽지요.” 그래, 무용수도 팽이처럼 회전을 많이 해야 하지. “쓰러지지 않고 돌려면 누군가가 계속 팽이를 때려줘야 합니다.” 잠깐의 정적. “당신에게는 그게 아버지입니다.” 세상에…. 어떤 말이 그와 아버지의 관계를 이보다 더 정확히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다. 열 살 때부터 당시까지, 아니 지금까지 그가 힘에 겨워 비틀거릴 때마다 균형을 잡아 다시 돌도록 해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 팽이채, 박보희(82·한국문화재단 총재). 딸, 팽이, 문훈숙(49·유니버설발레단장). 》

○ ‘당신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 노래 ‘Wind Beneath My Wings’ 가운데·이하 같음


착한 딸이었다. 1973년 초여름 어느 날, 아버지가 한국에 가자고 할 때도 아무 소리 없이 따라나섰다. 아버지는 일주일 뒤 자신만 미국으로 되돌아올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3남3녀의 넷째이자 둘째 딸. “지금 생각하면 언니나 여동생은 춤을 출 몸이 아니었어요. 제가 다리가 길고 가냘팠으니까 그러시지 않았겠어요?” 무슨 계획이 있었는지, 어떤 생각이었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그를 무용의 길로 이끌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리틀엔젤스 건물에 들어서자 단원 30여 명이 “미국 아빠가 오셨다”며 몰려들었다. 리틀엔젤스를 총괄하던 아버지였다. 미국 워싱턴에서 태어나 우리말도 제대로 할 줄 몰랐던 열 살배기는 낯선 광경에 겁이 나 아버지 곁에서 앙 울어버렸다. 아버지가 미국으로 떠난 날, 서울 용산 외가에서 아침부터 이불을 뒤집어쓰고 하루 종일 서럽게 울었다. 홀로 남겨졌다…. 낯선 외할머니, 낯선 이모, 낯선 한국어.

세계적으로 이름이 높던 리틀엔젤스의 해외공연을 두 달 남짓 앞두고 그는 장구춤, 소고춤, 부채춤 등을 배워야 했다. 여덟 살 때 발레를 배우긴 했지만 생판 처음 하는 한국무용 동작은 쉽게 몸에 붙지 않았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단원들. 남몰래 연습실 한구석에서 많이도 눈물을 훔쳤다. 울음이 점점 많아졌다.

선화예중에서 다시 발레를 시작한 그는 선화예고 1학년 때 발탁이 돼 영국로열발레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예기치 않던 외국인 차별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하위 클래스에만 속했고 정기 발표회에도 자리가 없었다. “자학한다”고 말할 정도로 스스로를 닦달하며 완벽하고자 했던 그에게는 속상한 일이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또 울었다. 그리고 미국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만 할래요.” 어머니는 “잘했다”며 좋아했다. 몸의 윤곽을 거의 다 드러낸 채 춤을 추는 딸의 혼삿길이 막힐까 평소에도 걱정이 많던 터였다.

다음 날 막 짐을 싸려는데 미국의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안 된다.” 결국 엄마와 아버지가 런던으로 날아와 사태는 진정됐다. 문훈숙은 모나코왕립발레학교로 옮겼다. 동양문화에 애정이 깊은 교장선생님을 만나 따뜻한 분위기에서 발레를 배웠다. 이후 워싱턴발레단에 있을 때 다시 한 번 발레를 포기하고픈 위기가 있었지만 그때도 곁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반항한 적은 없다. “내 사춘기가 언제였더라…. 사춘기를 겪지 않고 지나는 사람도 많지 않은가요?” 그는 약간 어색하게 웃었다.

○ ‘모든 힘을 가진 건 당신이었어요.’

유니버설발레단의 단장과 수석무용수를 겸하던 문훈숙은 2002년 오른쪽 발가락 골절 수술을 받았다. 수술 부위가 완치됐지만 발레단 행정에 치중하고 싶은 생각이 컸다. 아버지는 딸이 무대에 계속 서기를 바랐고, 그렇게 요구했다. 하지만 그는 단호했다. “아니에요, 아버지. 이건 내가 결정할 거예요. 내가 하고 싶으면 할 거예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아니요”라고 한 그때, 그의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발레는 그가 마다할 길은 아니었다. 원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길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가 가리킨 길이기도 했다. 작지 않은 부담이었다.

1989년 12월 21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한 호텔방에서 그는 바닥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 아시아인 최초로 세계 최상급 발레단인 키로프발레단과 함께 마린스키 극장에서 ‘지젤’을 공연하기 전날 밤이었다. 몇 번 연습을 했지만 흡족하지 않았다. 잘 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왜, 아버지는 나에게 이런 무거운 짐을 지운 것일까….’ 물론 이튿날 공연을 마치자 커튼콜이 쏟아졌다.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첫 무대가 됐다.

아버지는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었지만, 한편으로 그에게는 너무나 큰 대상이었다.

선화예중을 다닐 때 아버지는 이사장이었다. “너희 아버지가 그때 훈화하신 말씀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어”라고 하는 중학교 친구들이 적지 않을 정도로 아버지는 상대를 감화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데 뛰어났다. 일을 처리할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공연이 끝나고 문훈숙이 단장으로서 무대에 올라 마지막 인사를 할 때 입는 한복까지 직접 디자이너와 상의해서 제작했다. 단장의 무대 인사까지가 하나의 완결된 퍼포먼스라는 말과 함께.

그는 아버지가 맡았던 여러 직책을 지난 10여 년간 하나둘 맡게 됐다. 그전에는 ‘아버지에게서 그 일들을 물려받겠구나’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곤 했다. 그때마다 ‘내가 이걸 어떻게 해내지’ 하는 우려가 앞섰다. 아버지만을 바라보던 사람들에게 내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1000회 가까운 공연 중에 만족한 것은 서너 번뿐이라고 여기고, 초창기에는 공연이 끝나면 ‘망쳤다’는 생각에 사람들이 찾아올까 두려워 피해 다니기 일쑤였고, “잘했다”는 칭찬도 거짓말이라며 믿지 않았던 완벽주의자 문훈숙도 아버지는 넘기 어려운 산이었다.

“아버지의 그 ‘큰 신발’에 내 발은 너무 작기만 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어요. 아버지처럼 할 수 없을 텐데 하는 걱정이 컸지요.” 그러나 아버지만큼 해야 한다는 생각을 차츰차츰 내려놓으니 마음은 조금씩 편해졌다.

○ ‘당신은 내 날개를 떠받쳐 주는 바람’

1984년 아버지가 ‘영혼 결혼’이라는 말을 꺼냈을 때 그의 두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정혼(定婚)했던 상대가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그는 시댁의 성(姓)인 ‘문’을 자신의 성으로 삼았다. 그의 남편은 문선명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총재의 차남 흥진 씨(숨질 당시 18세)다.

결혼도 발레도 어떻게 보면 아버지가 제시한 방향이었다. 그는 발레에 대해서는 부담을 느꼈다. “서른아홉이 아니라 서른둘쯤에 ‘아니요’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하하.” 아버지가 하라고 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어서 발레를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물론 지금보다 더 잘됐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리고 원망도 없다. 그런데 결혼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지운 짐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왜 없었을까요. 지금 생각하니 저도 궁금하네요.”

서울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에서 사진촬영을 마치고 유니버설발레단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 박 씨와 마주쳤다. 문훈숙은 얼굴 한가득 웃음을 지으며 맞았다. 아버지와 헤어지면서 그가 말했다. “아버지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뭐냐고 아까 물었지요. 그 노래 알아요? ‘Wind Beneath My Wings’? 바로 그거예요.” ‘춤추는 요정’은 아버지라는 바람을 타고 여기까지 날아온 것이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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